확실한 것은 없다 | 본질이 아닌 부분을 보고 판단할 뿐이다

 

확실성의 속박 에서 벗어나려면

확실성의 속박 에서 벗어 나려면 


- 우리의 경험은 실재를 열어 보이는 창문이 아니다. 오히려 뇌는 우리의 신체 예산에 중요한 것을 중심으로 우리가 보는 세계를 모형화하도록 배선되어 있으며, 이 모형을 실재로서 경험한다.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경험이 마치 실에 꿴 구슬처럼 별개의 정신 상태가 연달아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우리의 뇌 활동은 내인성 핵심 신경망들 전체에 걸쳐 연속성을 가진다. 



- 우리의 경험은 두개골 밖의 세계가 촉발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예측과 수젖ㅇ이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 가운데 형성되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뇌가 창조한 마음이 뇌를 오해하게 만든다. 

많이 알려진 바로는, "우리의 뇌는 우리의 마음에 나타나는 그대로 다." 우리는 생각하므로, 우리의 뇌에는 생각하는 부위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감정을 경험하므로 우리의 뇌에는 감정을 담당하는 부위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 전 세계 사람들의 사고, 감정, 지각에 대한 증거가 우리에게 보이므로, 이에 상응하는 뇌 부위들은 보편적일 것이며, 누구나 동일한 정신적 실체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유전자를 통해 산출된 마음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될 것이다. 

이 동물과 저 동물에게서도 감정이 보이므로, 이런 동물들도 우리와 똑같은 보편적 감정 부위를 가지고 있는게 틀림없다. 신경 활동은 이 부위에서 저 부위로 마치 계주 선수가 바톤 터치를 하듯이 전달된다. 



- 본질주의는 인간 본성에 대한 견해를 넘어서, 세계관까지 제시한다. 그 동안 우리가 믿어 왔던 것은 사회에서 내가 차지하는 위치가 우리의 유전자에 의해 좌우된다고 암묵적으로 말한다. 따라서 내가 남보다 더 똑똑하거나 더 빠르거나 더 힘이 있다면, 다른 사람과 달리 내가 성공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사람들은 자격이 있는 만큼 얻고, 얻는 만큼 자격이 있다. 이것은 유전적으로 공정한 세계에 대한 신념이며,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과학처럼 들리는 이데올리기다. 


 우리가 '확실성'으로 경험하는 것은,


 - 즉 자기 자신, 다른 사람, 주위 세계에 관해 무엇이 진실인지 안다는 느낌은, 우리가 하루하루를 잘 헤쳐 나가도록 뇌가 꾸며낸 착각이다. 때때로 확실성을 조금씩 내려놓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두 성격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 관해 생각하고는 한다. 그 남자는 '너그러워', 그 여자는 '정직해', 내 상사는 '멍청한 자식'이야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 우리는 확실성의 느낌에 사로잡혀 마치 이들의 너그러움, 정직, 멍청함이 실제로 이들의 본질이며, 이들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마치 이것들을 객관적으로 탐지하고 측정할 수 있는 것처럼 취급하기 쉽다. 

이런 태도는 이들을 향한 우리의 행동을 좌우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런 행동이 정당하다고까지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너그러운' 남자는 그저 당신에게 잘 보이려는 것일 수 도 있고, '정직한' 여자는 은밀히 자기 잇속을 챙길 수도 있고, 당신의 '멍청한' 상사는 집에 앓아 누운 아이 때문에 마음이 딴 데 가 있을 수도 있다. 



확실성은 다른 설명 가능성을 놓치게 만든다. 


- 이것은 우리가 현실 파악을 제대로 못할 만큼 어리석거나 모자라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파악할 단 하나의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뇌는 주위에서 들어오는 감각 입력에 대해 하나 이상의 설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실재가 무수하게 많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 이상인 것은 분명하다. 



- 적당량의 회의주의는 기존에 믿어왔던 유전적으로 공정한 세계와는 다른 세계관을 낳는다. 사회에서 내가 차지하는 위치는 무작위로 결정된 것도 아니지만,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가난하게 태어난 아프리카계 미국 아이의 경우, 이 아이는 뇌 발달의 초기 시기에 적절한 영양을 공급받을 가능성이 높지 않다. 

특히 아이의 환경이 전전두 피질(prefrontal cortex)의 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곳의 뉴런들은 학습과 통제에 특히 중요하다.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이 부위의 크기와 성능은 학교 공부를 잘하기 위해 필요한 많은 기술과 연관이 있다. 



- 영양 불량은 얇은 전전두 피질로 이어지고, 이것은 열등한 학교 성적과 연관이 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는 낮은 교육 수준은 다시 빈곤으로 이어진다. 이런 순환 과정을 통해 인종에 대한 사회적 고정 관념은 사회적 실재에서 뇌 배선의 물리적 실재로 변화할 수 있으며, 그래서 마치 빈곤이 줄곧 유전자 탓이었던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물론 이런 고정 관념이 뜻밖에 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도 있다. 스티븐 핑커는 <빈 서판 The Blank State>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백인보다 복지 수당을 받을 확률이 더 높다고 믿는 사람들은, 비합리적이거나 편협한 자가 아니다. 조사 수치를 비교해보면 이런 신념이 맞기 때문이다." 



- 그러나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즉 공식 복지 통계 수치가 맞는 까닭은 우리가 사회를 통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관과 관행을 몇몇 집단의 의견을 제한하고, 그들의 가능성을 위축시키면서 다른 집단의 기회는 확장한다. 

그러고는 고정 관념이 정확하다고 말한다. 고정 관념이 정확한 것은 우리가 집단적 개념들을 가지고 먼저 창조한 것이다. 사람들은 당구대 위를 굴러다니며 서로 부딪치는 당구공들의 집합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의 신체 예산을 조절하고, 개념과 사회적 실재를 함께 형성하는 뇌들의 집합이며, 이런 과정을 통해 서로의 마음이 구성되고, 서로의 결과가 결정되는 데 기여한다. 



- 또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여기에는 덜 유복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도 포함된다. 우리가 그들의 뇌 배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견해와 관련이 있다. 

전통적인 아메리칸 드림에 따르면, 


"노력하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 고 하는데, 구성적 견해에서도 우리가 우리 운명의 주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환경의 제약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속한 문화에 의해 결정되는 우리의 뇌 배선이 우리의 나중 의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은 전혀 불편을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동안 익숙했던 개념을 문제 삼거나, 어떤 것이 물리적이고, 어떤 것이 사회적 인지를 따지는 것은 신선한 느낌을 가져다 준다. 

따라서 우리가 범주 화를 통해 의미를 창조하고, 재 범주 화를 통해 의미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일종의 자유를 가져다 준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어려울 때는 희망이 생기고 잘나갈 때는 감사하게 된다. 










확실한 것은 없다 | 본질이 아닌 부분을 보고 판단할 뿐이다 확실한 것은 없다 | 본질이 아닌 부분을 보고 판단할 뿐이다 Reviewed by 해결사 on 3월 12, 2022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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