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와 '분노'의 차이는?

 

증오 본질 

증오 본질


- 분노(anger)는 과도기적 정서 상태인데, 진행 중인 활동이 방해를 받을 때 생겨난다. 특정 시점에 확인 가능한 자극이 유발한 정서이기 때문에 좌절의 원천을 직접 공격해서 피해를 입히고 싶은 충동으로 이어진다. 

오래전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는 증오(hatred)와 다르다고 말하면서, 분노는 통상 개인에게만 느끼는 것이지만, 증오는 집단 전체에 느낄 수 있다고 얘기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를 이기지 못한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분노 표출을 미안해하고, 공격 대상에 연민을 느끼지만, 증오를 표현할 때는 거의 후회가 따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증오는 더 깊게 뿌리내려 있으면서 항상 "증오 대상의 소멸을 욕망한다."


분노와 증오의 차이 


- 분노는 정서이고, 증오는 정조(sentiment), 즉 개인 혹은 집단을 향한 공격 충동의 영속적 조직으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증오는 습관적인 부정적 감정과 비난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개인의 정신적/정서적 단단한 구조를 형성한다. 

증오는 사회 분열을 야기하고, 종교의 규탄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강한 윤리적 색채를 띠지만, 증오하는 자들은 대개 이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쉽게 벗어난다. 본질적으로 외부 처벌적이다. 그 이유는 증오하는 사람은 증오 대상에 잘못이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는 한은 그는 자신의 무자비한 마음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증오가 외부 집단으로 향하는 이유


- 증오와 공격성의 대상이 되는 데는 훌륭한 이유가 있다. 사람은 어쨌든 서로 비슷하다. 즉 자신과 닮았다. 그리고 사람은 희생양에게 동정심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희생양을 향한 공격은 공격자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고통을 유발할 것이다. 

타인의 신체가 자신의 신체와 비슷하기 때문에 자신의 '신체 이미지'가 관련될 것이다. 그러나 집단에는 신체 이미지가 없다. 집단은 더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이다. 특히 보이는 것으로 구분되는 어떤 특징이 있다면 더 그렇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이라면 우리 무리에서 어느 정도는 열외시킬 수 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을 개인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단지 외부집단의 일원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는 적어도 일부는 '우리'와 닮았다. 


- 추상적인 집단을 증오하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그 집단의 구성원 개개인에게는 공평하고 친절하게 대한다. 개인보다 집단을 증오하는 것이 더 쉬운 또 다른 이유다. 우리는 집단에 관한 우호적이지 않은 고정관념을 사실에 비추어 굳이 검증할 필요가 없다. 

개별 구성원들을 '예외 사례'로 치부한다면, 고정관념을 더 쉽게 주장할 수 있다. 


증오의 두 부류


- 하나는 '합리적' 증오이고, 다른 하나는 '성격화된(character-conditioned)'증오다. 합리적 증오는 중요한 생물학적 기능을 한다. 사람의 기본적인 권리가 침해될 때다. 자신의 자유, 생명, 가치를 위협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증오한다. 

또 제대로 사회화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자유, 생명, 가치를 위협하는 것도 무엇이든 증오한다. 전쟁이 대표적인 예다. 합리적 증오는 '성격화된' 증오만큼 우려할 만한 것이 아니다. 성격적 증오를 품은 사람들은 무언가를 증오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인생에서 오랫동안 겪은 쓰라린 실망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실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그의 좌절은 유동 공격성의 주관적 상대인 일종의 '유동 증오'와 결합한다. 대립을 바라는 막연하고 기질적인 억하심정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 무언가를 증오해야만 한다. 


 증오의 진짜 뿌리는 그를 좌절시키겠지만, 그는 어떤 편리한 희생양과 훌륭한 이유를 찾아낸다. 삶이 망가진 자들이 최악의 '성격화된' 증오를 품는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자신이 가치를 부여하는 뭔가가 침해되지 않는 이상 합리적 증오도, 성격적 증오도 품지 않는다. 


증오가 발생되는 이유


사랑이 변해 생긴 증오 말고는 어떤 미움도 세상에는 없으며, 경멸당한 아이 말고는 어떤 분노도 지옥에는 없다. 


 즉 증오의 발생은 이차적이고 우연적이며 발달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늦게 나타난다. 증오는 언제나 애착 관계에 대한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자존감이나 가치관이 모욕당했을 때 생긴다. 


- 인간 관계의 전체 영역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왜 우리에게 중요한 애착 욕구와 부합하고, 또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을까? 왜 많은 사람들이 증오와 적개심의 마음으로 나아갈까?

왜 충성심과 사랑은 적고 제한적일까? 언제 인간은 내심 충분히 사랑하거나 사랑받을 수 없다고 느낄까? 


충분한 애착관계를 형성하기 힘든 이유는?


1) 사람들을 괴롭히는 좌절의 양과 인생의 어려움에 관련된다. 극심한 좌절 때문에 되풀이되는 분노는, 합리화된 증오와 쉽게 결합한다. 상처를 피하고 최소한의 안전지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배제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2) 학습과정과 관계 있다. 거부적인 가정에서 자라거나 기성의 편견에 노출된 아이들은 신뢰를 담아 친애적으로 사회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발달시킬 수 없다. 아이들은 거의 애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애정을 나눠줄 처지가 아니다. 


3) 인간관계에 배타적 접근 방식을 취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인류를 이루는 큰 집단에 부정적 관점을 취하면, 인생을 더 단순하게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외국인을 하나의 범주로 삼아 거부하면, 그들을 내 나라에 들어오지 못하게 제지하는 일 말고는 성가시게 고려할 것이 없다. 



- 이런 식으로 다양한 정도와 다양한 종류의 증오, 공격성과 관련된 편견의 유형이 개인의 세계관 내에 존재하게 된다. 여기에는 부인할 수 없는 효율성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이 원래 품고 있는 꿈과는 거리가 멀다. 

여전히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는 삶에 대한 애착과 동료 인간들과 평화롭고 우애 깊은 관계를 갈망한다.  









'증오'와 '분노'의 차이는? '증오'와 '분노'의 차이는? Reviewed by 해결사 on 11월 11, 2022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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